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란쌍 왕국 (문단 편집) === 건국 === ||[[파일:fa-ngum.jpg|height=300]]||[[파일:239f941e52747c12f104c0b933541010.jpg|height=300]]|| ||파응움 국왕||[[비엔티안]]의 파응움 동상|| 란쌍 왕국이 세워지기 이전 라오스 지역에서는 여러 토착 민족들이 섞여 통일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여러 소왕국들을 세우고 난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1300년대에 란쌍 왕국의 시조인 파응움(ຝ້າງູ່ມ)이 등장하면서 라오스의 정치 구도가 본격적으로 바뀌게 된다. 파응움의 할아버지인 수바나 캄풍은 [[루앙프라방]] 일대를 지배하는 군주로, 파응움의 아버지인 왕세자였다. 파응움은 어린 나이에 인근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9세의 양자로 입적되어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야바르만 9세는 자신의 딸을 파응움에게 주었고, 덕분에 파응움은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갖추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343년에 할아버지 수바나 캄풍이 세상을 떠나자 루앙프라방에서는 왕위계승분쟁이 일어났다. 수바나 캄풍이 제대로 된 후계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면서 여러 후계자들이 왕위를 주장하면서 수바나 캄풍이 남기고 간 왕위를 차지하려 들었다. 이 상황에서 크메르 제국은 자신들이 데리고 있던 파응움에게 군사를 주어 왕위 쟁탈전에 내보냈다. 당시 크메르 제국은 [[흑사병]]과 내분의 심화로 막 국력이 쇠퇴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인근의 란나 왕국과 수코타이 왕국 등이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크메르 제국은 주변의 동맹국이 절실했고, 루앙프라방 지역에 친크메르 요인인 파응움이 왕이 된다면 크메르 제국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파응움은 약 1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라오스 남부부터 차근차근 정벌하기 시작했다. 파응움은 대도시인 [[비엔티안]]을 복속시킨 뒤 루앙프라방을 차지하고 있던 삼촌을 몰아내고 1353년에 루앙프라방의 왕위에 올랐다. 파응움은 국호를 '란쌍', 즉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으로 바꾸었으며 [[메콩 강]] 일대의 영토에 군사 원정을 실시하면서 국력을 높여나갔다. 한편 태국의 우통 국왕이 [[아유타야]]를 세우고 점차 크메르 제국을 위협하면서 크메르 제국의 세력은 날로 쪼그라들어갔다. 아유타야 왕국은 크메르 제국의 서쪽 영토를 집어삼켰고, 최종적으로는 크메르의 수도인 [[앙코르]] 함락에도 성공하며 크메르 제국에게 치명타를 먹였다. 이후 크메르 제국은 완전히 남쪽으로 밀려났고, 이과정에서 크메르 인근의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때문에 1356년에 파응움 국왕은 군대를 이끌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비엔티안 지역을 다시 재정벌하였고, 팽창하는 아유타야 왕국을 견제하였다. 한창 내치에 신경을 쓰던 아유타야 왕국은 란쌍 왕국과도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100마리의 코끼리, 황금을 란쌍 왕국에게 넘겨주고 심지어 우통 국왕의 딸을 파응움 국왕의 2번째 왕비로 보내기도 했다. 이후 파응움 국왕은 중국, [[베트남]]과의 국경을 확립하고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파응움 국왕은 이렇게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으나, 수코타이 왕국과 지나치게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신망을 잃었으며 결정적으로 귀족층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에 실패하여 결국 자신의 아들인 삼센타이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파응움은 강제로 루앙프라방의 왕궁에 유폐되었고, 1380년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371년에 왕위에 오른 삼센타이 국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러 군사적 업적을 남겼으며 인근의 [[란나]]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다. 또한 중국의 [[명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책봉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외교를 펼쳤다. 1416년에 삼센타이 국왕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란 캄 다엥 국왕이 왕위에 올랐다. 란 캄 다엥 국왕은 당시 명나라 치하에서 고통받던 베트남인들이 [[람썬 봉기]]를 일으키자 3만 명의 군사와 100마리의 코끼리를 보내어 명나라 군대를 도와주기도 했다. 란쌍 왕국은 란 캄 다엥 국왕 사후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1428년부터 1438년까지 남자 왕 7명과 여왕 1명이 연달아 즉위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신기한 것은 이 남자 왕 7명이 모두 뒤에서 국가를 좌지우지했던 한 왕비에 의해서 암살되었다고 한다. 왕비의 이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보통 '[[낭 깨오 핌파]]', 즉 '잔인한 자'라고 불린다. [[낭 깨오 핌파]]는 1438년에 7번째 남자 왕을 죽인 뒤 직접 왕위에 올라 라오스 역사상 유일한 여왕이 되었으나, 재위 몇 달 만에 조정에 의해 [[나가]]에게 제물로 바쳐져 강에서 익사했다.] 1440년에는 이 틈을 타 [[비엔티안]] 지역이 봉기를 일으켰고, 수도 루앙프라방의 궁정에서는 겨우겨우 비엔티안의 반란군들을 진압했다. 란쌍 왕국의 혼란기는 1456년에 차카파트 국왕이 즉위하면서 종결된다. 참고로 이 시기에 라오스-베트남 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베트남의 [[대월]]은 [[람썬 봉기]] 때 란쌍 왕국이 명나라 군대에게 협력했던 것에 깊은 앙금을 품고 있었고, 때문에 란쌍 왕국과 베트남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이렇게 긴장 관계가 고조되던 와중 한 사건이 터진다. 베트남 [[레 왕조]]의 [[성종(레)|성종]]이 란쌍 왕국에 흰 코끼리[*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는 백색 코끼리가 신성한 왕권의 상징이었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흰 코끼리의 털을 뽑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란쌍 왕국은 이를 왕권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고, 상자에 코끼리 똥을 가득 담아 베트남 조정에 보내버렸다. 당연히 빡돌은 베트남은 18만 대군을 보내 란쌍 왕국을 공격했고, 란쌍 왕국은 20만 대군으로 반격했으나 곧 털렸고 국왕은 베트남 군대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베트남 군대는 국왕을 잡기 위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란쌍 왕국 전역을 헤집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각개격파당했다. 이후 베트남 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하면서 마지막 복수로 수도인 루앙프라방의 왕궁에 불을 놓았다고.[* 이후 약 200여 년 간 베트남과 라오스의 직접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